본문은 성서일과에 따라 새번역으로 소개합니다.
1 새 노래로 주님께 찬송하여라.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시다. 그 오른손과 그 거룩하신 팔로 구원을 베푸셨다.
2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알려 주시고, 주님께서 의로우심을 뭇 나라가 보는 앞에서 드러내어 보이셨다.
3 이스라엘 가문에 베푸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해 주셨기에, 땅 끝에 있는 모든 사람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수 있었다.
4 온 땅아, 소리 높여 즐거이 주님을 찬양하여라. 함성을 터뜨리며,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여라.
5 수금을 뜯으며, 주님을 찬양하여라. 수금과 아우르는 악기들을 타면서, 찬양하여라.
6 왕이신 주님 앞에서 나팔과 뿔나팔 소리로 환호하여라.
7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과 세계와 거기에 살고 있는 것들도 뇌성 치듯 큰소리로 환호하여라.
8 강들도 손뼉을 치고, 산들도 함께 큰소리로 환호성을 올려라.
9 주님께서 오신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오시니, 주님 앞에 환호성을 올려라. 그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뭇 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리실 것이다.
새 노래로 주님께 찬송하여라!(1절) 저는 오늘 말씀에서 이 '새 노래'라는 표현을 깊이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우리 신앙의 근간이고 고백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노래의 내용입니다. 그 구원과 창조와 돌보심을 우리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느끼는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글자가 글자로만 남아있다면,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악보가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감정과 느낌을 갖게 되듯이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라는 '주체'를 통해서 새롭게 연주되어야 합니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누는 곳이 교회여야 하고, 넘지 말아야 하는 선과 넘어야 하는 선을 정하는 것을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새로운 노래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새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주님의 의로우심을 많은 나라가 보는 앞에서 드러내 보이셨음을 찬양합니다. 함성으로, 수금과 악기와 나팔로, 손뼉치며 찬양합니다. 이토록 온 대지와 하늘 높이 올리는 찬양은 분명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찬양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찬양이 이스라엘만 기뻐 찬양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쁨의 찬양은 이땅의 모든 백성들이 전부 다 해야 할 일입니다. 3절 "이스라엘 가문에 베푸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해주셨기에, 땅끝에 있는 모든 사람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수 있었다." 이 기쁨의 찬양은 이스라엘을 통해 땅끝까지 전해지고 일어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인 겁니다. 요즘 코로나19를 통해서 교회의 민낯이 많이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쓰라린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되고 설레이기도 합니다. 지금 드러나는 교회의 민낯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교회 안"에만 가두어두고 있다가 점점 왜곡되고 뒤틀려버리게 된 결과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교회 안"에서 "교회 밖"-땅끝까지 전해질 때 진실되고 바를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어노인팅의 '희망의 노래'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감사해 고통과 눈물 없는 곳 열어 주시리 감사해 모든 만물 새롭게 되는 그 날 주시리" 이런 가사의 후렴 부분을 부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과거'나 '현재'로 인해 감사한 적은 있으나, '미래' 때문에 감사한 적은 없었구나. 참 믿음은 에벤에셀, 임마누엘을 경험하였기에 감사하는 것을 넘어 '여호와 이레'를 믿고 감사하는 것임을 묵상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며 위 찬양과 그 때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4절에서 8절까지 정말 신나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온갖 악기로 모든 피조물과 함께 소리 치며 주님을 노래합니다. 노래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입니다.(1절~3절) 다른 하나는 행하실 일입니다.(9절) 시인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 뭇 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리실 것임을 믿고 주님 앞에 한호성을 지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찬양의 지경이 더 넓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가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르지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은 그럴만한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시인은 바벨론 포로기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포로기를 보내며 혹독하게 자신을 성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약점이 많은 인생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억하시고 찾아가셔서 다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비단 그 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수 천 년, 수 만 년의 세월 동안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나의 부족함이 오늘 너무 크게 느껴질지라도 낙망하지 않고, 주님을 은혜를 기다리며 그 분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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