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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아, 잘해보자/자고 있지 않은 너에게 #자정묵상

#다니엘 3장 1-18절 중 8-10절

by CloudChurch2020 2020. 10. 19.

본문은 성서일과에 따라 새번역으로 소개합니다.

8   그 때에 이 일과 관련하여, 어떤 점성가들이 나서서, 유다 사람들을 고발하였다. 
9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러바쳤다. "임금님, 만수무강 하시기를 바랍니다. 
10   임금님, 임금님이 명령을 내리시기를, 나팔과 피리와 거문고와 사현금과 칠현금과 풍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나면, 누구나 금 신상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라고 하셨고, 
11   엎드려서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2   임금님께서는 유다 사람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임명하여, 바빌론 지방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임금님, 그런데 그들은 임금님께 경의를 표하지 않으며,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그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습니다."
13   이 말을 듣고서 느부갓네살 왕은 노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데려오라고 명령하니, 그들이 왕 앞에 붙들려 왔다. 
14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들어라. 너희가 참으로 나의 신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느냐? 
15   지금이라도 너희가 나팔과 피리와 거문고와 사현금과 칠현금과 풍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내가 만든 신상에게 엎드려 절을 할 마음이 되어 있으면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즉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아뢰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17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18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불굴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들의 굽히지 않는 믿음과 더불어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가 함께 보입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길 수 없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지금이라도' 목숨은 건질 기회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완강하게 믿음을 지킵니다.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이 정도 각오였다면, 왕 앞에 붙들려 올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차피 줄을 목숨, 자신들의 신앙을 인정해 주지도 않는 왕에게 한 번쯤 도발할 법도 하지 않나? 끝까지 왕 앞에서 '굽어 살펴주십시오'(16,18절)라며 신하의 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뭘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왕이 세운 신상에는 절하지 않았지만, 신하로서 왕으로서의 한 인간 느부갓네살에 대한 충정의 태도는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 또는 믿음의 결이 조금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거칠고 모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견고히 지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니엘의 세 친구를 통해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 신들을 섬기던 고대 근동사회의 사람들에게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을 하는 것이 크게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믿는 신은 아니었지만, 금신상에 절을 하는 예식을 통해 왕의 안위와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못 할 일도 아니었겠지요. 한 마디로 타협점이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신앙을 가진 세 명의 친구들에게 이 일은 타협점이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우리에게도 타협이 가능한 일이 있고 타협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타협해야 할 일에 적절하게 타협을 한다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협하지 말아야 할 일에 타협을 하고, 타협을 해야 할 일에 타협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비대면 예배로 전환되었을 때, 사람들은 신앙을 타협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반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니 예배하는 장소에 있어서는 타협을 하지 않으려 하면서, 예배의 본질에 있어서는 날마다 타협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되었지요. 직분에 따라 순서가 맡겨지고, 눈치에 밀려 예배 담당자들이 결정되었지요. 오늘 우리의 삶에서 타협하며 조화를 이룰 일은 어떤 것일까요? 반대로 절대 타협불가를 외치며 지켜야 할 신앙의 본질은 또 무엇일까요? 주님의 지혜를 구하며 하루를 시작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이 세 친구들이 보여준 두 가지 믿음을 다 겸비하고 싶습니다. '불 속에 던져저도' 와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먼 타국 바벨론까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 중 유능한 사람들을 느부갓네살왕이 등용했습니다. 다니엘과 오늘 나오는 주인공들이 바로 그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이 불타는 경험을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 성전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했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동족들이 포로로 끌려가 아픔을 당하는 이런 큰 삶의 이벤트를 마주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며 원망하는 것이 편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살펴보면 우리 역사의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때도 유관순 열사와 같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 다이나믹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느브갓네살왕 앞에 끌려간 세 친구들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 속에 던져져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이 몸이 다른 신 앞에 절 할 수는 없겠습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붙잡아야 할 것은 놓아버리지 않기를. 놓아버릴 것을 붙잡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되게 유명한 말씀이죠. 아마도 설교 강단 위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가 오늘 말씀이네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상에 절을 하라는 왕의 명령에 대해 반기를 든 세 친구에게 왕은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질 것이다." 곧 "죽일 것이다."라고 했죠. 그러나 그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상에 절을 하지 않겠다며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지 않더라도 절하지 않겠다고 말하게 된 것이죠. 결국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에는 "내 생명은 하나님 것이다."는 신앙고백인 거죠. 우리가 되게 자주 써먹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에 우리는 어떤 고백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의 고백은 좀 가볍지 않았을까요?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뭐.. 괜찮습니다. 이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뭐... 상관없습니다. 이 정도 아닌가요? 말씀 속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를 말하려면, 정말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상, 바꿔 말하면 돈-명예-자존심-체면과 같은 것들을 빼앗길지라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의 결단들이 반드시 나타나야만 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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