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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아, 잘해보자/자고 있지 않은 너에게 #자정묵상

#마태복음 14장 1-12절

by CloudChurch2020 2020. 10. 17.

본문은 성서일과에 따라 새번역으로 소개합니다.

1 그 무렵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자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2 "이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3 헤롯은 일찍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 때문에 요한을 붙잡아다가 묶어서,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그것은, 요한이 헤롯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그래서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민중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서, 헤롯을 즐겁게 해주었다.
7 그리하여 헤롯은 그 소녀에게,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맹세로써 약속하였다.
8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로 가져다 주십시오."
9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를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고 있는 앞이므로, 그렇게 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10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내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께 가서 알려드렸다.

사람들의 욕망과 욕심은 때때로 잔인합니다. 나의 것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지요. 우리 세상에 이런 것만 남아 있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다행히, 그 반대의 경우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채우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아직 우리가 세상을 희망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오늘 이 사단이 나게 한 주인공 헤롯은, 어제 신명기 묵상 말씀에 나타난 왕의 자격에 어느 하나도 맞지 않아보입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로부터 인정받았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였는데 그 마지막은 비참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부조리한가요? 왜 손놓고 계시지요? ..... 이 어그러짐의 이유는,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과시하고 싶은 헤롯의 욕심, 인정받고 싶은 헤로디아 딸의 욕심, 복수하고 싶은 헤로디아의 욕심의 결합은 고귀한 사람의 생명을 짓밟는 참혹한 결과를 불렀지요. 욕심이 욕심을 부를 때, 우리의 선한 양심이 경고의 사이렌을 울린다면, 그 자리에서 멈추세요. 그리고 돌아서면 됩니다. 에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아닙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창조하신 선한 양심의 주인공들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편이라 자랑할 것이 없는데,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정말 많은 애를 쓰는 게 제 자랑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도 자신의 생일에 흥이 겨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그 "약속"이 눈엣가시였던 "세례 요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때 9절 말씀을 보니 "왕이 근심하나"라고 합니다. 그의 근심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이 근심이 "자신의 약속" vs "그래도 사람의 생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약속"+"자신의 체면"+"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헤롯은 요한을 죽이게 되죠. 이 말씀을 보면서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이 있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약속"이라고 다 제대로 된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 "약속"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오히려 지키지 않아야 할 "약속"도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약속"을 하면서 살아갈 텐데, 그 "약속"은 상대방의 "생명"과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체면"과 "유익"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오늘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헤롯은 요한에 대한 두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한 것에 대한 불만, 그래서 요한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편 그가 옳은 사람이기에 두려워하고 보호하며 그의 말을 달게 듣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막 6:20) 그런데 결국, 헤롯은 요한을 죽이게 됩니다. 헤로디아의 딸 때문이라고 하지만, 최종 결정은 헤롯이 내렸기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헤롯은 눈 앞에 '사람'을 두려워하는, 즉 평판에 얽매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마음과 달리 요한을 죽이지 못했던 것은, 민중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5절) 반대로 헤로디아가 요한의 목을 요청하였을 때 죽이고 싶지는 않아 괴로운 마음이었을 때에는 손님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두려워 죽이지 못하고, 손님들이 두려워 죽이는 헤롯의 모습 속에서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눈 앞에(오늘날 스마트폰 화면 넘어의) 사람들의 평판이 어떨지, 늘 노심초사 신경 쓰고 얽매이는 저는 본문의 헤롯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여 속상하고 두렵습니다. 몸은 죽이되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능히 멸하시는 하나님만(마10:28)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를 취한 옳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례 요한을 진작 제거하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의식하며 눈치만 보고 있었지요. 세례 요한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워 세례 요한을 살해했지요. 사실 헤롯만 욕할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역시 남의 눈치로 인해 해야 할 일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 앞에서 살아가는 삶과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아가는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울은 사람의 눈을 의식하다 다윗을 죽이려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았기에 부하들의 바람을 저버리고 사울을 살려줬지요(삼상 24장). 그러나 잠깐의 손해와 불평을 마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선택한 용기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귀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그런 멋진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리저리 사람들의 눈치만 보다가 마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 앞에서 옳은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그런 인생 말입니다.

마음이 괴로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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